성범죄의 성립 요건인 '유형력의 행사'에 관하여

작성자 : 법무법인 온세상 변호사 박유빈

19세기 말 미국 법원은, 강간죄의 성립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 최후까지의 저항(utmost resist)이 있었는지를 그 기준으로 삼았다. 피해자는 어떠한 폭행이나 협박, 기타 위력을 행사가 있더라도 마지막까지 저항함으로써 거부 의사를 밝혀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강간죄의 성립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 법원의 태도에 힘입어, 당시 미국의 변호사들은 강간 행위를 spinning bottle, 즉 회전하는 술병의 입구에 연필을 집어넣는 행위에 비유하였다. 빠르게 회전하는 술병의 입구에 연필을 집어넣을 수 없듯이 피해자가 최후까지 저항하였다면 성관계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므로, 성관계가 성립한 이상 피해자가 최후까지 저항하였다고 볼 수 없어 이를 강간죄로 의율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우리 형법은 ‘폭행 또는 협박’을 성범죄의 구성요건으로 하고 있다. 우리 법원은 성범죄의 구성요건인 ‘폭행 또는 협박’이란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여야 한다고 해석하고 있으며,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정도의 유형력’은 성범죄의 구성요건인 ‘폭행 또는 협박’에 이르지 않는다고 하여, 피해자가 단순히 거부 의사를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저항할 것을 전제하고 있다.

성범죄의 보호법익이 ‘성적 자기결정권’인 점에 비추어 볼 때, 이와 같은 우리 법원의 태도가 과연 법의 취지에 부합하는지는 의문이다. 피해자의 의사에 반한 성적 접촉에 의하여 이미 보호법익의 침해는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침해행위에 대하여 저항하지 아니한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보호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이는 아무런 근거 없이 피해자에게 적극적으로 저항할 의무를 부과하는 것으로 부당하다. 특히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관계, 사건 발생 당시의 상황, 범행의 수법 등 여러 사정에 비추어 피해자가 저항을 할 수 없는 심리적 압박이 있는 경우, 이미 가해자가 성범죄의 실행에 착수하는 것 자체가 피해자에 대한 폭행 또는 협박에 해당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폭행 또는 협박으로 억압하여야 할 정도의 저항이 있어야만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가 인정된다면, 성범죄의 피해를 입을 위기에 처한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뿐만 아니라 생명 또는 신체의 안전이라는 더 큰 법익의 침해까지 감수하면서까지 범의를 가진 가해자를 상대로 적극적인 저항을 하게 될 것인바, 오히려 범죄피해가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서울서부지방법원은 형부가 처제인 피해자를 추행한 후, 추행을 피하여 다른 방으로 이동한 피해자를 따라가 다시 추행한 사건에서 ‘피해자가 형부의 추가적인 추행이 있을 것을 예견하였거나 예견할 수 있었으므로, 상대방에 대해 폭행 또는 협박을 가해 항거를 곤란하게 한 뒤에 추행행위를 한 경우에 해당하거나 피해자의 부주의 등을 틈 타 기습적으로 실현된 것이라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피고인의 추가 범행에 대하여 무죄를 인정하였다.

자신의 언니와 형부 간의 부부생활이 파탄될 것을 우려하여 피해자가 범죄사실을 주변에 적극적으로 알려 도움을 처하지 못하였던 점, 피해자로서는 사건 당시 피고인에게 거부의 의사를 표시하고 범죄 현장을 이탈함으로써 피고인의 범행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저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적극적인 저항’이 아니라고 판단한 점, 강제추행죄의 구성요건도 아닌 ‘예견가능성’을 범죄 성립 여부의 판단 기준으로 삼은 점 등, 위 판결은 범행 발생 당시 피해자가 처하였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피해자에게 근거 없이 범죄 발생을 예견하고 방어하여야 할 의무를 부여하고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익의 침해를 인정하지 아니하였다. 이 판결은 단지 법리적인 결함이 있는 점에 그치지 아니하고, 성범죄 피해자들이 성범죄 피해사실을 신고하기 어렵도록 할 뿐만 아니라 성범죄 성립의 역치값을 높여 수사기관이 성범죄를 수사·기소함에 있어서도 상당한 부담을 가지도록 한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법학자 Susan Estrich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여성의 No는 No를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에 입각한 ‘No’가 우리 법원의 존중과 보호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안경환(1988). 强姦罪. 「사법행정」. 29(12), 85~87.